나들목일산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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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나들목 공동체 운영원리

2021년 8월~9월 주보칼럼
10월이면 창립 6주년을 맞이한다. 2015년 일산에서 여러분과 함께 시작한 나들목일산교회는 일곱살이 된다. 개척 초기의 교회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문제이고, 우리가 걸어온 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4년부터 10여명의 개척멤버들이 각자의 지인들을 공동체로 초대하고, 일산에 나들목교회가 생긴다는 소식을 알고 찾아오신 분들과 함께 40인의 가족들과 그들의 아이들로 2015년 2월부터 홀트학교 강당에서 매주 예배를 드리며 그렇게 교회는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종개혁 기념주일에 우리는 창립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교회의 출발을 선언하였다.
그때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고자 했으며 지금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가? 먼저, 나들목일산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내재적인 요인은 '찾는이 중심, 진실한 공동체, 균형 있는 성장, 안팎의 변혁, 소망하는 예배' 를 근간으로 하는 5대 중심가치이다. 이 가치들은 '사명선언문'과 '나들목일산교회의노래', 그리고 나들목일산교회MOSAIC 에 반영되어 있고 풍성한삶의제자도와 일상의 사역들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외재적 요인은 세월호 참사, 촛불항쟁, 그리고 산황산과 기후위기로 요약될 수 있다. 일산에서 나들목교회를 시작하며 지금까지 경험해온 지역과 국가와 전지구적 이슈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해 왔다. 복음의 총체성을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에 기초하여 신학과 실천, 예배와 삶이 통합된 우리 나름의 신앙적 성찰을 통해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모습과는 분명히 다른,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되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지구적 위기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정체성과 가치가 우리의 삶과 사역의 내용을 규정하고 반영하고 있다면, 또한 우리에게는 공동체의 삶과 사역의 방식과 직결되는 요소인 우리 나름대로의 공동체 운영원리가 있다. 이 또한 모교회인 나들목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다. 그 내용은 '1. 성경의 최종적인 권위의 원리', '2. 영적 분별에 의한 의사결정의 원리', '3. 영적 지도자 그룹의 원리', '4. 섬김의 원리', '5. 자발적 헌신의 원리'로 구성된 다섯가지 운영원리이다.
대학로에서 2002년에 나들목교회가 세워진 지도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앞서 언급한 나들목교회 다섯가지 핵심가치와 함께 나들목 공동체 다섯가지 운영원리는 20년간 나들목교회와 나들목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걸어온 성경적이고 현대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발걸음을 통해 다듬어지고 완성되어 지금의 모습을 보여준다.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외형적인 성장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고 있는 이 시기에 앞으로 5주간 이 지면을 통하여 매주 한가지 원리를 재확인하며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나들목일산교회라는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내고 있으며 살아내야 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살펴 보고자 한다.
제1원리, 성경의 최종적인 권위의 원리 -
우리는 …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우리는 인간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행위를 주관하는 궁극적이고 유일한 권위로 성경을 따른다. 우리는 성경이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엄중히 선언한다. 우리는 성경을 능가하는 또 다른 계시는 존재하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기록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고히 지지한다. 또한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조명하여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지난 20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회 세계복음화국제대회(로잔대회)의 신앙고백문 중 성경에 관한 내용이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1차 대회의 신앙고백문을 계승한 고백이다. 우리 교회는 세계 복음주의의 훌륭한 유산인 로잔언약과 케이프타운선언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복음주의 독립교회이다.
교회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존재가 있다. 전통적인 옛교회에서는 교황이나 주교가 최고의 권위를 가질 것이요,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담임목사가 최고의 권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교회에서도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모든 발걸음을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각자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각자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공동체가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분별할 것인가? 문서로 기록된 말씀으로 완성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으며 저마다 주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객관적으로 검증하여 교회가 걸어가야 할 공적 발걸음을 정당하게 걸어갈 수 있다.
우리 교회 가족이 될 때 서약하는 하늘가족서약문 중에는 ‘공동체 지도자의 올바른 권면에 순종한다’는 내용이 있다. 공동체 지도자의 권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선포하는 설교이다. 무엇이 올바른 설교인가? 올바른 성경해석을 통해 성경의 진리가 올바로 적용된 설교가 올바른 설교이며, 공동체 지도자의 올바른 권면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최종적인 권위는 대표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 대표목사의 설교와 사역은 올바른 성경해석에 기초한 것일 때에 한하여 올바르며 성경의 권위를 정당하게 빌렸기에 권위가 있는 것일 뿐이다. 물론 설교에도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나의 비판이 정당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관찰-해석-적용’이라는 귀납법적 성경해석에 근거한 정당한 비판이어야 한다. 설교는 공동체의 대표자를 통하여 이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 생각과 비슷한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은혜(?)를 받거나 내 생각과 다른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거부하거나 하는 것은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 내 마음에 안들고 내 생각과 달라도 설교가 올바른 성경해석의 결과라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며, 내 마음에 들고 내 생각과 비슷해도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나온 설교라면 올바른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올바른 성경해석에 기초한 정당한 비판과 진리를 위한 건강한 토론문화가 살아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이 최종 권위를 가진 교회,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른 성경해석을 통해 올바로 선포되는 교회, 그 설교가 올바른 성경해석을 통해 건강하게 수용되고, 잘못되었을 경우 올바른 성경해석을 통한 비판이 가능한 교회, 우리는 끝까지 그런 교회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예컨대 온 가족과 성장세대가 날마다 함께하는 말씀묵상은 가족들의 성경해석 능력을 키워주며, 그런 교회를 앞당길 것이다.
제2원리, 영적 분별에 의한 의사결정의 원리 -
사도행전 15:6–12
6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다. 7 많은 논쟁을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 9 하나님께서는 …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 11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은 조용해졌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현장에 유대인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에 대한 유권해석을 예루살렘 교회에 요청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를 충분히 토론하고, 리더인 베드로가 최종 결정하였다.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모든 구성원들은 리더의 말에 승복하였다. 이것이 나들목공동체 운영원리 중 두번째인 영적 분별에 의한 의사결정의 원리의 일례이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의사를 결정한다. 개인은 개인 대로 가족은 가족 대로 나름의 방식으로 의사를 결정한다. 교회는 교회 대로 나름의 방식으로 의사를 결정한다. 교회가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이 바로 영적 분별이다.
대한민국의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된 1987년 이후 사회의 전반에서 민주적 운영은 상식이 되었다. 한국 교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장로회의 경우 장로회 제도가 감독제, 교황제 등 다른 제도에 비하여 민주적인 제도라고 헌법(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에 밝히고 있을 정도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라는 방법으로 형식화 된다는 것이다. 다수결은 더 많은 표를 받은 쪽으로 결정하는 효율적인 의사결정 방식이다. 이 방식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 의견이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며, 소수 의견 반영이 불가능하고, 찬반 양론이 과열될 경우 공동체 전체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히틀러와 박근혜의 당선도 다수결의 결과였고, 최근 문제가 된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직 세습도 모두 다수결로 승인되었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결정이다. 이 둘은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 물론 우리 교회에서도 투표를 한다. 재산을 사고 팔 때, 대표목사를 임면할 때이다. 재산은 단순다수결이 아니라 과반수를 의결정족수로 하며(절대다수결), 대표목사는 3분의 2를 의결정족수(제한다수결)로 한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한 모든 의사결정은 충분히 토론하고 대표가 결정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공동체를 운영한다. 이 방식은 다수결의 여러 단점들을 보완할 수 있으며 찬반으로 양분된 교회의 여론을 통합할 수 있다. 토론이 충분하게 이루어지면 의견들의 장단점이 충분히 드러나고, 다양한 의견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다. 대표는 다양한 의견들을 조율하고 반영하여 최종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대표는 고도의 책임감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결정을 하기 위해 깊은 숙고와 기도와 묵상을 할 수 밖에 없다. 대표를 신뢰하는 모든 구성원들은 대표의 신중한 결정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이 영적 분별에 의한 의사결정의 원리이다.
제3원리, 영적 지도자 그룹의 원리
카톨릭 교회는 교황이 전 세계에 한 명인데, 개신교회는 교회마다 교황이 하나씩 있을 수 있다는 슬픈 농담이 있다. 그나마 로마 교황직은 세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당 교회 안에서는 개신교 교황의 권력이 로마 교황보다 강력한 측면도 있다. 권력을 한 사람이 휘두르다 보면 개인이 우상화 되고, 국가나 사회는 병들고, 심지어는 권력을 세습하기도 한다. 그래서 북한과 몇몇 교회들은 묘하게 닮았다.
신약성경에서 만나는 초대교회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수 지도체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도자가 세워져서 함께 사역하는 복수 지도체제였다. 오늘날은 장로직과 목사(목자)직과 감독(주교)직과 나아가 집사(부제)직이 교단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제도화 되어 있지만 신약성경의 초대교회에서 명백히 구분되는 역할의 차이는 사도직과 집사직에서만 발견되며 장로, 감독, 목자직은 혼용되었다.
사도행전20:17–36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 28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 36바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위 인용구절에서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직책은 장로(17절)이면서, 그들의 역할은 목자(28절,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와 감독(28절)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장로는 성도를 대표하여 중요한 결정을 하는 역할이며, 감독은 교회와 성도들이 건강하고 평안하도록 감독하는 역할이며, 목자는 성도를 전인격적으로 양육하는 역할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정당하게 세워진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와 같이 장로와 감독과 목자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그들은 성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교회의 일꾼을 세우고(6장),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선교사를 파송하고(13장)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도 하였다(15장). 그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지도자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 여러 명의 사람들이었다.
제1원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교회 가족이 될 때 우리 모두가 한 서약, 하늘가족 서약에는 ‘공동체 지도자의 올바른 권면에 순종’한다는 서약이 있다. 이 서약은 성도의 양심의 자유와 순종의 의무를 동시에 부여한다. 모든 성도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공동체 지도자의 권면에 순종하거나 순종하지 않을 선택권이 있다. 올바른 권면이 아닐 경우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하고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함께 분별하여 결정한 권면은 올바른 권면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신뢰하는 성도는 이 권면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순종할 수 있다.
이렇게 공동체의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의 신앙과 삶이 건강할수록 교회는 건강하다. 여기에는 한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계속해서 건강한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당신이 계속해서 이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해 가지 않으면 이 교회는 병든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의 성장이 바로 교회의 건강이다.
제4원리, 섬김의 원리
지금까지 우리는 나들목공동체가 복수의 공동체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숙의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한 명의 찾는이가 나들목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계속해서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교회는 성숙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해 간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고인 물이 되어 썩는다. 어떤 사람들이 공동체의 리더로 성장하는가? 그것을 밝혀주는 원리가 네번째 나들목공동체 운영원리인 ‘섬김의 원리’이다.
마가복음 10:43–45
43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한다. 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리더십을 벼슬자리 정도로 이해하는 세속적인 이해가 제자들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리더십이 세상 리더십과 어떻게 다른지 말씀하신다.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며 가장 많이 섬기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섬김에 대한 가르침을 말 뿐 아니라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신 섬김의 사건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누군가를 섬기지 않고 섬김을 받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찾는이와 손님이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거나 아직 우리 교회 가족으로 서약하지 않은 분들에게 교회는 그 어떤 섬김도 요청하지 않는다. 그저 그분들이 우리 교회가 제공하는 예배나 모임, 온라인 컨텐츠를 활용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진보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가족이 되면 그때부터 섬김의 삶이 시작된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신앙과 삶을 함께하며 하나님과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나의 소중한 것들을 나누며 조금씩 성장해 간다. 신앙이 성장해 갈수록 섬김도 성장해 간다. 말씀의 훈련과 섬김의 훈련을 통해 가족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에서 ‘예수 따르미’의 삶으로 결단하며 언약가족과 목자로 성장해 간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교회에서 뭔가를 맡고 있지 않아도 사람을 좋아하고 섬기기를 잘하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도 물론 훌륭하다. 그러나 언약가족과 목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할 때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와 나들목일산교회의 사명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들목일산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공동체의 섬김이로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끌어간다. 우리는 모두 과거 어느 순간에는 찾는이였다. 그랬던 우리가 지금은 감사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이 길이 주님께서 앞서 가신 길이 정말 맞다면, 우리가 찾는이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듯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공동체와 이웃을 더욱 섬기는 사람들로 성장해갈 것이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섬기셨기 때문이다.
제5원리, 자발적 헌신의 원리
드디어 다섯번째, 자발적 헌신의 원리를 다룰 차례이다. 섬김은 강요되지 않는다. 강요는 섬김을 불러 일으킬 수 없다. 오직 사랑에 기초한 섬김만이 섬김의 연쇄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사랑을 받은 경험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섬김을 받은 경험은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기자신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공동체의 리더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의 섬김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며 자발적인 헌신이다.
내 한 몸 지탱하기도 힘겨운 세상에서, 애들 키우며 먹고 살기도 빠듯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공동체를 세우고 교회의 가족을 섬긴다는 것은 누가 시키거나 어떤 댓가를 준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자신이 공동체를 통해서 받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그의 삶을 섬기는 삶으로 초대한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헌신한 사람들이(제5원리, 자발적 헌신의 원리)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들(제4원리, 섬김의 원리)로 성장해 가며 영적 지도자 그룹(제3원리, 영적 지도자 그룹의 원리)을 형성하고, 이 그룹은 가족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제2원리, 영적 분별의 원리)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제1원리, 성경의 최종적인 권위의 원리) 공동체를 세워간다.
섬김 보다는 계약과 거래에 익숙한 시대에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다. 섬김은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섬김은 비효율적이다. 나의 섬김에 비례하여 누군가가 쑥쑥 성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섬김은 사랑을 쏟아붓고 퍼주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섬길 수 없다. 애초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지 않으면 성장하지도 않는다. 섬기고 손해보는 사람이 없는 공동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섬김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을 사람들이 아닌가. 예수님의 섬김으로 시작된 이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의 섬김을 닮아 그분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태어나고 자라나지 않으면 공동체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해 간다. 그러나 누군가 성장하고 있다면 누군가 섬기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희망이 있다. 심지어 병든 몸에서도 어떤 지체는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을 거부하거나 멈춘 지체가 많으면 공동체의 건강은 악화된다.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건강하지 못한 교회들의 문제는 결국 성장의 문제이다. 스타 목사의 화려한 설교에 환호하는 성도들로 가득한 교회에서 성도는 성장할 필요가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반복해서 티켓을 사는 관객이 많으면 공연은 계속된다. 제왕적 목사나 장로의 독재적 리더십에 좌우되는 권위주의 교회에서는 성도에게 복종만이 강요된다. 성도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에서 독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목회자 1인이나 극소수의 지도자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교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 나라 복음 공동체의 정체성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교회는 가능한가? 공동체의 지도자 그룹에 계속해서 새로운 리더, 새로운 세대가 충원되고 이미 리더가 된 이들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갈 때 교회의 교회됨은 지속가능하다. 그런 교회는 썩어가거나 말라가는 웅덩이가 아니라 맑은 샘물이다. 성장은 스스로 할 수 없지만 섬기는 삶은 당신의 자발적 헌신이다. 그런 사람은 성장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이 많은 교회는 건강할 수 밖에 없다.